출처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004표어: 맛있게 살자! - 그동네 (http://gdong.net)의 Renyts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물론! 이자리에 들어갈 만큼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서도오오오!!!
본좌가 생물학을 전공하는 관계로 하여....빼놓으실 수 없는 멘델 선생...
후크선생 , 하비 선생등등 생물학에 기라성 같은 분들이 많으셨으나 기실상 생물학에는 수학적인 어떤 요소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상식....은 아니고 여하간 그런 건데 여하간 유전학이라는 개념을 등장시키면서 유전자 등에 대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던 희대의 생물학자 멘델. 그는 불행히도 당대에는 재 평가를 받지 못한 불운한 과학자였다. (어쩌면 불운한 건 아닐수도 있다...단지 제 평가를 받지 못했을 뿐이지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다간 사람이다...--;; 당연하겠지만! 어떤 미친놈이 나 멘델 교수의 자손이오. 라고 말하면 때려죽여야 한다. 멘델선생은 신부님이셨기 때문에..--;;)
멘델 선생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시다.
라부와지에 선생 와트 선생 등등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편이고 갈릴레오 선생 케플러 선생등은 그럭저럭 살만한 집 출신이다. 아이작 선생은 가난한 편이었고 마이클 선생은 찢어지게 가난한 편이었다. 멘델선생은?
멘델 선생 역시 가난했다. 마이클 선생보다는 나은 편이었겠지만.(초등교육은 받았다.) 뭐 집에서 더 이상 교육은 불가능 하다...라는 판정이 나왔다. 그러나 멘델은 항학렬이 강했으며 수학에 (생물학이 아니다! 멘델 선생은 수학을 잘했다!)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언제나 천재 옆에는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법. 멘델 주변 사람이 공부를 계속하고 싶으면 신학공부를 해서 수도원의 자금 지원을 받으면서 공부를 해라. 라고 충고해 주었고 이미 여자보다는 책에 관심이 많았던 멘델 선생 눈이 확 뒤집혀져 당장 수도원의 도움을 받아 공부를 시작했다.
멘델 선생 수도사가 되시다.
당시 멘델 선생은 수학 뿐만이 아니라 자연철학의 여러 파트에 다 능했던 모양이다. 이것저것 손을 많이 댔는데 뭐 성적은 상위권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진화론에(물론 다윈의 진화론이 아니다. 멘델의 유전학과 진화론은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 게다가 유전학이 연구가 8년 가까이 걸렸으므로 멘델이 다윈의 영향을 받았을 리는 절대 없다. )발을 대면서 (수도사로서는 사실 진화론에 손을 댄다는 것은 치명적이다...당시로서는.)갑작스레 생물학에 불타오르게 된다. 그렇지만 멘델선생은 신학 성적도 우수했으며 지금껏 자신을 공부하게 해 준 수도원의 의리를 저버리지 못하고.(물론 신학 생활을 하면 그럭저럭 먹고 사는데 지장 없다는 점도 무시 못한다.) 정식으로 사제가 되고 만다.(표현이 좀 이상하다.--;;)
멘델 선생 식물 유전학에 관심 가지다
사실 멘델 선생이 관심이 가져도 아무도 그걸 신경 쓰지는 않았다. 이뉴는 간단한데 멘델이 학자가 아니었기 떄문이다.어디까지나 그는 생물학에 관심있는 괴짜 신부였고 그가 이곳저곳 대학을 돌아다니면서 그쪽 강의를 듣고 다녀도 사람들은 음..신학 공부 하면서 저런데도 관심을 가지는군..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멘델은 이 빈 대학 등지에서 강의 를 들으면서 식물 유전에 대해 연구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으며 1854년에는 그것을 마침내 시행에 옮기게 된다.
멘델 선생 완두콩을 고르시다.
사실 멘델 선생이 완두를 고른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세대가 짧고 여기저기서 잘 자라고 또 종자가 많고......가장 중요한 이유는 수도원에서 완두콩 스프를 잘 만들어 먹기 떄문이다..(라는 설이 있다.) 여하간 이 멘델의 작물 선택 조건은 지금도 생물학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로 인정되니 멘델 선생 선견지명이 대단하다 하겟다. (지금은 애기 장대르는 식물을 주로 사용한다.)
멘델 선생이 대조를 통해 유전자를 비교했는데 그때 고른 7가지 형질도 대박이었다. 키와 색 , 주름 등등의 대립형질은 정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대립이 발생하는 형질로서 만약 멘델이 하나라도 어설픈 대립 형질을 가지는 형질을 골랐으면 멘델 쫑이었다. 이 면에서 멘델의 선택은 대박으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이 운을 주신거라는 설도 있다. )
여하간 멘델은 이 완두콩 세고 자시고 하는 짓을 무려 8년이나 계속하는데 생물학 연구는 근성과 끈기를 가지고 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멘델은 여기서 멘델의 법칙이라 불리는 우열의 법칙과 분리의 법칙을 발견하며 유전자의 존재에 대해서 예언하게 된다. 이는 생물학적 결과를 수학적으로 분석한 것으로서 수학 잘하던 멘델 선생만이 할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전까지는 생물학 데이터를 수학으로 분석할려던 사람이 없었거던...
사실 멘델선생이 지맘대로 앞마당에 완두콩을 깔아놓을 수 있었던 데에는 멘델선생이 수도원 2짱으로 올라갔다는 면도 들 수 있다. 원래 머리가 좋아서 신학 성적도 좋았던 멘델 선생은 당삼빠다! 차기 수도워장으로 찍히게 되고 어린 나이에 수도원 2짱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멘델 선생 연구 논문을 펴내다.
멘델 선생 이 연구를 바탕으로 유전자라는 엄청난 학문을 열면서 <<식물잡종의 연구>> 라는 논문을 펴내지만 사람들이 개무시 한다. 어디서 공부도 안하는 신부가 허접같은 연구를... 이라는 반응과 식물을 전부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고 할려구? 라는 비난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을 정도로 주목도 글지 못한채.(ㅡㅜ) 무참히 씹힌다. 그래서 멘델 당시 생물학 권위자를 찔러 보지만 누구도 그 진가를 알지 못한채 무시당한다. 성직자였어도 멘델선생 성깔있었나부다.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이 말은 진짜 한 말임.)
"그러나 결국은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 "
결국 멘델 선생은 그 뒤에 연구를 계속 하려고 했지만 수도원장에 취임하면서 (46세라는 젊은 나이였다. 역시 엘리트!) 잡무에 시달리다 보니 연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1884년에 편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멘델 선생의 업적과 논문은 그런 글이 나왔다는 것만을 알린 채 그렇게 먼지를 맞아가고 있었다.
멘델 선생의 논문 빛을 보다.
네덜란드의 드 프리스, 독일의 코렌스, 오스트리아의 체르마크라는 국적이 다른 세 사람의 과학자는 각각 유전의 법칙에 대해 발견하게 된다. 이 사람들은 셋이 똑같이 연구를 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이전의 연구들을 분석하던중 자기보다 무려 35년이나 더 이전에 매우 과학적인 증명 방법으로 유전의 법칙을 주장하고 더 나아가 유전자의 존재까지 예언한 괴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한 신부이며 이미 죽었고 매우 사실적인 데이터에 입각해 자료를 구축한 것도 알게 된다. 이 세 학자의 이름과 함께 멘델의 이름이 떠오르게 되었으며 멘델의 법칙은 유전학의 시초로 대단한 반향을 불러오게 된다 멘델의 말 대로 그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멘델 선생 온화하셨다.
멘델 선생은 신학자라 그런지 매우 온화하셨다고 한다. 근성있는 연구를 짜증도 안 내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신부님 다운 근면함과 성실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 수도사들에게 화 내는 일이 없는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논문이 씹혔다고 해서 아이작 선생처럼 분노해서 복수를 다짐하지도 않는 언젠가는 내 세상이 오겠지..하고 달관하며 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신부라서 당연히 자손은 없구..뭐 오래오래 수도원에서 잘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멘델의 법칙은 사실 사람들이 너무 우매할떄 등장한 거라서 개무시 당했다. 만약 그게 진화론과 같이 나와 같이 받아들여졌다면 아마도 세계 역사가 바뀔 정도로 무시무시한 대 발견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역사의 싸움에서 그는 승리했으며 위대한 과학자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2004표어: 맛있게 살자! - 그동네 (http://gdong.net)의 Renyts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물론! 이자리에 들어갈 만큼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서도오오오!!!
본좌가 생물학을 전공하는 관계로 하여....빼놓으실 수 없는 멘델 선생...
후크선생 , 하비 선생등등 생물학에 기라성 같은 분들이 많으셨으나 기실상 생물학에는 수학적인 어떤 요소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상식....은 아니고 여하간 그런 건데 여하간 유전학이라는 개념을 등장시키면서 유전자 등에 대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던 희대의 생물학자 멘델. 그는 불행히도 당대에는 재 평가를 받지 못한 불운한 과학자였다. (어쩌면 불운한 건 아닐수도 있다...단지 제 평가를 받지 못했을 뿐이지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다간 사람이다...--;; 당연하겠지만! 어떤 미친놈이 나 멘델 교수의 자손이오. 라고 말하면 때려죽여야 한다. 멘델선생은 신부님이셨기 때문에..--;;)
멘델 선생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시다.
라부와지에 선생 와트 선생 등등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편이고 갈릴레오 선생 케플러 선생등은 그럭저럭 살만한 집 출신이다. 아이작 선생은 가난한 편이었고 마이클 선생은 찢어지게 가난한 편이었다. 멘델선생은?
멘델 선생 역시 가난했다. 마이클 선생보다는 나은 편이었겠지만.(초등교육은 받았다.) 뭐 집에서 더 이상 교육은 불가능 하다...라는 판정이 나왔다. 그러나 멘델은 항학렬이 강했으며 수학에 (생물학이 아니다! 멘델 선생은 수학을 잘했다!)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언제나 천재 옆에는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법. 멘델 주변 사람이 공부를 계속하고 싶으면 신학공부를 해서 수도원의 자금 지원을 받으면서 공부를 해라. 라고 충고해 주었고 이미 여자보다는 책에 관심이 많았던 멘델 선생 눈이 확 뒤집혀져 당장 수도원의 도움을 받아 공부를 시작했다.
멘델 선생 수도사가 되시다.
당시 멘델 선생은 수학 뿐만이 아니라 자연철학의 여러 파트에 다 능했던 모양이다. 이것저것 손을 많이 댔는데 뭐 성적은 상위권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진화론에(물론 다윈의 진화론이 아니다. 멘델의 유전학과 진화론은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 게다가 유전학이 연구가 8년 가까이 걸렸으므로 멘델이 다윈의 영향을 받았을 리는 절대 없다. )발을 대면서 (수도사로서는 사실 진화론에 손을 댄다는 것은 치명적이다...당시로서는.)갑작스레 생물학에 불타오르게 된다. 그렇지만 멘델선생은 신학 성적도 우수했으며 지금껏 자신을 공부하게 해 준 수도원의 의리를 저버리지 못하고.(물론 신학 생활을 하면 그럭저럭 먹고 사는데 지장 없다는 점도 무시 못한다.) 정식으로 사제가 되고 만다.(표현이 좀 이상하다.--;;)
멘델 선생 식물 유전학에 관심 가지다
사실 멘델 선생이 관심이 가져도 아무도 그걸 신경 쓰지는 않았다. 이뉴는 간단한데 멘델이 학자가 아니었기 떄문이다.어디까지나 그는 생물학에 관심있는 괴짜 신부였고 그가 이곳저곳 대학을 돌아다니면서 그쪽 강의를 듣고 다녀도 사람들은 음..신학 공부 하면서 저런데도 관심을 가지는군..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멘델은 이 빈 대학 등지에서 강의 를 들으면서 식물 유전에 대해 연구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으며 1854년에는 그것을 마침내 시행에 옮기게 된다.
멘델 선생 완두콩을 고르시다.
사실 멘델 선생이 완두를 고른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세대가 짧고 여기저기서 잘 자라고 또 종자가 많고......가장 중요한 이유는 수도원에서 완두콩 스프를 잘 만들어 먹기 떄문이다..(라는 설이 있다.) 여하간 이 멘델의 작물 선택 조건은 지금도 생물학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로 인정되니 멘델 선생 선견지명이 대단하다 하겟다. (지금은 애기 장대르는 식물을 주로 사용한다.)
멘델 선생이 대조를 통해 유전자를 비교했는데 그때 고른 7가지 형질도 대박이었다. 키와 색 , 주름 등등의 대립형질은 정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대립이 발생하는 형질로서 만약 멘델이 하나라도 어설픈 대립 형질을 가지는 형질을 골랐으면 멘델 쫑이었다. 이 면에서 멘델의 선택은 대박으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이 운을 주신거라는 설도 있다. )
여하간 멘델은 이 완두콩 세고 자시고 하는 짓을 무려 8년이나 계속하는데 생물학 연구는 근성과 끈기를 가지고 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멘델은 여기서 멘델의 법칙이라 불리는 우열의 법칙과 분리의 법칙을 발견하며 유전자의 존재에 대해서 예언하게 된다. 이는 생물학적 결과를 수학적으로 분석한 것으로서 수학 잘하던 멘델 선생만이 할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전까지는 생물학 데이터를 수학으로 분석할려던 사람이 없었거던...
사실 멘델선생이 지맘대로 앞마당에 완두콩을 깔아놓을 수 있었던 데에는 멘델선생이 수도원 2짱으로 올라갔다는 면도 들 수 있다. 원래 머리가 좋아서 신학 성적도 좋았던 멘델 선생은 당삼빠다! 차기 수도워장으로 찍히게 되고 어린 나이에 수도원 2짱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멘델 선생 연구 논문을 펴내다.
멘델 선생 이 연구를 바탕으로 유전자라는 엄청난 학문을 열면서 <<식물잡종의 연구>> 라는 논문을 펴내지만 사람들이 개무시 한다. 어디서 공부도 안하는 신부가 허접같은 연구를... 이라는 반응과 식물을 전부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고 할려구? 라는 비난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을 정도로 주목도 글지 못한채.(ㅡㅜ) 무참히 씹힌다. 그래서 멘델 당시 생물학 권위자를 찔러 보지만 누구도 그 진가를 알지 못한채 무시당한다. 성직자였어도 멘델선생 성깔있었나부다.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이 말은 진짜 한 말임.)
"그러나 결국은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 "
결국 멘델 선생은 그 뒤에 연구를 계속 하려고 했지만 수도원장에 취임하면서 (46세라는 젊은 나이였다. 역시 엘리트!) 잡무에 시달리다 보니 연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1884년에 편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멘델 선생의 업적과 논문은 그런 글이 나왔다는 것만을 알린 채 그렇게 먼지를 맞아가고 있었다.
멘델 선생의 논문 빛을 보다.
네덜란드의 드 프리스, 독일의 코렌스, 오스트리아의 체르마크라는 국적이 다른 세 사람의 과학자는 각각 유전의 법칙에 대해 발견하게 된다. 이 사람들은 셋이 똑같이 연구를 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이전의 연구들을 분석하던중 자기보다 무려 35년이나 더 이전에 매우 과학적인 증명 방법으로 유전의 법칙을 주장하고 더 나아가 유전자의 존재까지 예언한 괴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한 신부이며 이미 죽었고 매우 사실적인 데이터에 입각해 자료를 구축한 것도 알게 된다. 이 세 학자의 이름과 함께 멘델의 이름이 떠오르게 되었으며 멘델의 법칙은 유전학의 시초로 대단한 반향을 불러오게 된다 멘델의 말 대로 그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멘델 선생 온화하셨다.
멘델 선생은 신학자라 그런지 매우 온화하셨다고 한다. 근성있는 연구를 짜증도 안 내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신부님 다운 근면함과 성실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 수도사들에게 화 내는 일이 없는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논문이 씹혔다고 해서 아이작 선생처럼 분노해서 복수를 다짐하지도 않는 언젠가는 내 세상이 오겠지..하고 달관하며 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신부라서 당연히 자손은 없구..뭐 오래오래 수도원에서 잘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멘델의 법칙은 사실 사람들이 너무 우매할떄 등장한 거라서 개무시 당했다. 만약 그게 진화론과 같이 나와 같이 받아들여졌다면 아마도 세계 역사가 바뀔 정도로 무시무시한 대 발견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역사의 싸움에서 그는 승리했으며 위대한 과학자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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